왕과 사는 남자 그 후의 이야기: 영월로 유배된 단종의 쓸쓸한 죽음, 그리고 남겨진 이들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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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셋째 주 '한 줄의 이야기'
영화 <왕과 사는 남자>가 남긴 여운을 넘어, 역사 속에 묻혀 있던 단종과 그를 끝까지 지키고자 했던 충신들의 가슴 먹먹한 이야기가 지금 다시 펼쳐집니다.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올랐지만 거대한 권력 다툼 속에서 운명을 빼앗겨야 했던 단종. 그리고 자신의 안위보다 충절과 의리를 선택하며 단종을 지키고자 했던 수많은 인물들의 선택은 오늘날까지도 깊은 울림을 전하고 있습니다.
이번 주는 영화가 미처 담아내지 못했던 단종의 입체적인 삶과 당시 시대상을 더욱 깊이 있게 살펴봅니다. 단종의 폐위와 유배, 죽음에 얽힌 다양한 기록과 숨겨진 야사(野史), 그리고 그를 위해 목숨을 바친 충신들의 이야기를 통해 역사의 이면을 만나볼 수 있습니다.
비극 속에서도 끝까지 지켜낸 충절과 인간적인 고뇌, 그리고 수백 년의 세월을 지나 오늘날까지 전해지는 단종의 이야기를 따라가며 역사의 한 페이지를 깊이 있게 들여다보는 특별한 역사 교육에 여러분을 초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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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경세자 | 덕종
단종의 죽음 이후, 경복궁에 드리우는 어둠
의경세자는 아버지 세조와는 다르게 성품이 바르고 온화해서 생전에 집안 어른들에게 많은 사랑을 받았고, 주변에서도 평판이 좋았으며, 어려서부터 예의가 바르고 기질도 선했다.
의경세자는 병약하여 잔병치레를 자주 했는데, 1457년 병이 크게 들어 세조의 명으로 21명의 승려가 경희루에 공작재를 베풀고 병의 치유를 빌었다. 하지만 세조의 이러한 노력에도 1457년, 19세로 요절했다.
비극은 연쇄 반응처럼 이어졌다. 차남 예종의 부인은 17세의 산후병으로, 유일한 아들은 3살에 세상을 떠나며예종 본인 역시 불과 1년 만에 의경세자와 같은 나이인 20살에 요절하고 만다.
이처럼 단종의 죽음 이후, 세조 주변에서는 알 수 없는 병으로 사랑하는 사람들이 죽어갔고 사람들은 이를 단종을 몰아내고 살해한 업보라고 생각했다.
영월에서 일어난 기이한 죽음
1660년 영월군수 윤순거는 노산군과 관련된 모든 자료를 수집해 <노릉지>를 편찬했다.
“세조 3년(1457) 10월 24일 유사에 공생이 활줄로 노산군의 목을 졸라 숨지게 하였다.”
단종은 사약을 거부하고 활줄에 목이 졸려 죽은 것으로 추정된다. 이와 관련해 조선 후기의 야담집 <금계필담> 등에 흥미로운 설화가 전해진다.
단종이 죽고난 뒤에 영월에는 새로 부임한 군수들이 연이어 죽어 나가는 변고가 생겼다고 한다. 그러다 문신 박충원이 상관에게 미움을 받아 영월군수가 되었고 부임한 첫날 밤에 주위를 물리치고 방안에 홀로 앉아 있었다.
한밤중에 홀연히 익선관을 쓰고 곤룡표를 입은 임금이 들어와 말했다.
영월 청령포
“나는 공생에 의해 목매어 죽었는데 아직도 활줄이 감겨 있어 아픔을 참을 수 없구나.” 박충원은 단종의 혼령임을 알아차리고 뜰에 내려가 엎드렸다.
“신이 풀어드리고 싶지만, 전하의 옥체가 어디에 있는지 모릅니다.”
“그동안 부임한 사또들은 내 말도 듣기 전에 놀라서 죽었는데 그대는 용기와 충심이 가상하도다. 내가 묻혀 있는 곳은 전에 호장으로 있던 엄흥도가 알고 있다.”
단종의 혼령은 이렇게 말하고 사라졌다. 다음 날 아침 신임 군수는 아전에게 엄흥도를 찾아오라고 명했다. 관아에 불려 온 엄흥도는 어린 임금의 시신을 자신이 거뒀다고 고했다.
“소인이 그날 전하의 옥체를 받들어 모셨지만, 활줄은 미처 풀지 못했습니다.”
박충원은 엄흥도와 함께 단종이 묻힌 곳에 가서 관을 열게 하였다. 시신은 마치 살아 있는 듯했는데 활줄이 여전히 목에 감겨 있었다. 즉시 그것을 풀고 정성껏 제문을 지어 제사를 올렸다. 그날 밤 단종의 혼령이 다시 나타나 두 사람을 치하하고 보답을 약속했다.박충원은 명종·선조 대에 육조 판서를 모두 거치고 양관 대제학을 지냈다.